[경기 부천] 제69회 광복절이었던 지난 15일,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소재로 한 영화 ‘명량’이 누적관객수 1,330만 명을 돌파, 영화 ‘괴물’(1,301만)을 제치고 역대 한국영화 흥행 1위에 올랐다. 같은 날 국내 유일의 출판만화축제인 부천국제만화축제 현장에서는 ‘이순신과 명량해전’을 주제로 한 역사 토크가 펼쳐져 영화 ‘명량’의 흥행 분위기를 이어갔다.
대하역사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총 2,077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기록으로, 국보 151호이자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복원한 작품이다.
대하역사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작가 박시백 화백
행사가 열린 부천시 상동에 위치한 한국만화박물관 1층 상영관은 방학을 맞아 학부모와 학생들고 장사진을 이루며 400여 석이 모두 꽉 찼다. 초등학생들은 이순신 장군이 왜 100원짜리 동전에 나왔는지? 궁금해했고, 영화 ‘명량’에 출연한다면 어떤 배역을 맡고 싶은지를 묻는 등 이순신에 대한 관심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단했다.
박 화백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에 대해 “하늘이 내렸다고밖에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천재라는 생각이 든다. 천재들은 보통 오만에 빠지기 쉬운데 매사를 설득하고 끝까지 리더십을 보여줬다. 신하들보다 100년은 더 앞서간 인물이다.”라고 평하며 이들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다. 한편, 행사장 옆 한옥마을 특설 만화 마켓관에는 조선 500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박시백의 조선왕실록전’이 열려 역사 토크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박시백 화백은 “이순신 장군은 전혀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만 묘사해도 인생 자체가 감동적인 인물이다. 영화에서는 좀 더 드라마틱하게 과장된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SNS에 올라온 ‘조선왕조실톡’에 답하고 있는 토크 3인방
이순신에 대한 짧은 오디오 드라마를 듣고 있다.
박 화백은 “이순신은 병법에서 중요한 지피지기를 정확히 알았다. 상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장단점을 철저히 연구했다. 적을 정확히 알고 싸우는 방식을 썼다. 부하를 다스릴 때에도 부하 장수들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술도 마시고 바둑을 두면서 어루만졌다.”며 “때문에 이순신의 휘하 장수들은 대장의 생각과 작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이로부터 환상의 조직력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원균에 대해서는 “척후선도 사전 정보도 없이 대규모 선단을 출동시켜 강행군을 거듭했다. 적선 몇 척이 보이면 유인선인 줄 모르고 전력을 다해 쫓곤 했다. 지칠대로 지친 조선 수군은 칠천량 바다에서 침몰했다.”며 “원균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힘들어하며 폭동을 많이 일으켰다. 변장으로서 기본이 안된 사람이 어떻게 포장이 되어 거기까지 갔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사회를 맡은 김학원 대표는 ‘전선의 수는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 여기지 못할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살 것이나 살려고 한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명량해전으로 돌아가 백성들을 상대로 어떻게 군사를 모으고 활동했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순신의 어마어마한 애국심과 용기을 강조하기 위해 정작 이순신이 가졌던 리더십이 간과되지 않았나 싶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으로 3군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은 곧바로 남해안으로 떠났다. 연안고을을 훑고 흩어진 장수와 병사를 모으고 군량과 무기를 마련했다. 병사와 백성들은 ‘이순신과 함께라면 싸워볼 만하다’며 동참했다.” (박시백)
“일본 수군은 12척의 이순신을 잡기 위해 300척을 동원했다. 울돌목(명량해협)은 해협이 좁아 300척이라고 해도 한꺼번에 나아갈 수 없었다. 때문에 일본 수군은 전선 수는 많았지만 조선군을 포위할 수가 없었다. 이순신이 명량해협을 고른 첫 번째 이유이다. 빠른 조류를 이용한 충돌공격으로 적들은 도주하기 시작했다. 조류의 흐름은 이순신이 명량해협을 택한 두 번째 이유다. 명량해전의 승리로 다시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은 빠르게 수군을 재건했다. 명량해전이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던 건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아서라고 본다. 영화제목이 ‘노량해전’이었다면 슬프게 봤을 것이다.” (신병주)
특설만화마켓관에서는 박시백 화백의 꼼꼼한 고증과 풍부한 자료 조사로 조선 500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전’이 열렸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전에 전시된 선조들
다음은 방청객과의 일문일답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봤는지. 봤다면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지. 내용도 소개해달라.
“봤다. 꼼꼼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A4용지 수십 장 되는 상소문이 다 기록돼 있고 왕의 답변, 대신, 대관, 유생들의 상소문도 일일이 기록으로 남긴 점이 기억에 남는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정신 자체가 대단하다.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말 그대로 조선왕조사 현장 기록이다. 기록을 전담한 사관이 왕이 있는 모든 자리에서 왕과 신하들의 행동, 사건, 사고, 농사 이야기 등을 다뤘다. 오늘날 언론의 역할을 대행했다고 생각한다.”
-조선왕조실록의 내용과 평소 알고 있는 경우와 다른 경우 독자들에게 괴리감을 주지 않고 어떻게 내용을 살렸는지.
“황희정승의 경우이다. 실제 우리가 알고있는 황희는 청렴결백의 화신이고, 두루뭉실한 성격으로 알고있다.그러나 부동산 사건에 여러 번 연루됐다. 생각보다 자기 입장이 분명한 인물이었다. 세종대왕은 워낙 토론을 좋아했는데 임금이 황희의 의견을 따를 정도로 판단력이 뛰어났고 균형감각이 있었다. 황희는 이 얘기 저 얘기를 듣고 중간역할을 잘 했다. 저울추 같은 역을 하며 재상으로 빼어난 점을 보여줘 세종이 높이 평가했다.”(박시백)
박 화백은 2001년 신문사를 그만두고 현재까지 조선시대 사관의 심정으로, 글로 된 역사를 만화로 풀어쓰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작화에 매진하고 있다.
-역사학자가 꿈인 12살 아이 키우는 엄마다. 조언을 부탁한다.
“역사책이나 영화에 나오는 현장을 많아 찾아다니면 자연스럽게 관심이 간다. 한 가지를 가지고 계속 연결시켜보기 바란다. 예를 들어 이순신에 대해 알게 되었다면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동상에 가 보면 이해가 빠르다.”(신병주)
-가장 애착이 가서 다 쓰고 나서도 좀 더 수정을 해야지 할 정도로 애착이 가는 인물이 있다면 그 이유는.
“많이 받는 질문이다. 당연히 세종이다. 워낙 성군의 이미지가 강해 트집을 잡아보려고 세종실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더 거인이고 더 대단했다. 정말 이런 분이 우리역사에 툭 떨어진 건 하늘이 내렸다고밖에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세종과 이순신 둘 다 어마어마한 천재이다. 천재는 오만에 빠지기가 쉬운데 그러지 않고 매사를 신하들과 의논하고 설득하고 리더십을 끝까지 보여주었다. 신하들보다 100년은 앞서간 인물인 것 같다.”(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밑그림이 된 박시백 화백의 노트
- ‘조선왕조 500년은 000다’로 방점을 찍는다면.
“조선왕조실록은 정치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사회, 경제, 문화, 외교 등 다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 세종 등 모범적인 인물이나 원균처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인물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 시대 우리땅에 살았던 선조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현재 또는 미래를 풍요롭게 해 주는 거울이다.”(신병주)
김 대표는 “사실 전쟁이 아니더라도 국가든 기업이든 가정이든 다 위기상황이 있다. 오늘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면서 생각나는 게 있다.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위기를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고 지도자 본인의 책임으로 여기고 끝까지 명을 걸고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라고 2시간 여의 행사를 마무리했다.
한편, 올해로 17회째를 맞은 부천국제만화축제는 경기도, 부천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주최로 ‘만화, 시대의 어울림’이라는 슬로건 아래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5일간 부천 일대에서 열렸다. 다양한 전시, 학술, 컨퍼런스, 체험, 마켓 등을 열어 10만 명 이상 다녀갔다.
정책기자 최정애 (프리랜서) cja3098@hanmail.net